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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직전 광주시내는 평온…교도소 습격설은 왜곡"경찰 137명이 37년만에 밝힌 5·18 증언
제37주년 광주민주화운동일인 18일 문재인 대통령이 기념식에 참석해 그날의 뜻을 기렸다. 사진은 1980년 당시 광주.(5·18기념재단 제공) 2017.5.18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에 있었던 경찰 137명이 37년만에 '5·18의 진실'을 위해 입을 열었다.

경찰들은 5·18 직전 광주시내는 평온한 분위기였고 공수부대의 과격진압은 신군부 집권세력의 의도성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시민들이 총기를 탈취해 무장한 시점도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발포 시점인 21일 오후 1시 이후라고 판단했다.

'5·18 북한군 개입설'은 '불가능한 상식 밖의 주장'이고 광주시민의 폭도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인용하는 '시민군의 교도소 지속 공격설'도 왜곡됐다고 지적했다.

전남지방경찰청은 11일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조사한 '5·18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을 발표하고 '북한군 개입설', '자위권 차원 발포' 논란 등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경찰은 5·18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 수집 및 활동조사 TF를 꾸려 지난 4월부터 5개월간 생존자 137명의 증언과 치안본부 자료 등을 토대로 조사했다.

◇ 5·18 직전 광주시내는 평온했다

5·18 직전 광주시내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군 개입의 정당성 여부를 가르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다.

전두환 등 신군부는 5·18 직전 광주 시내는 학생시위로 무질서와 혼란이 극에 달해 군의 개입이 없어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찰은 정 반대로 평화적 가두시위가 있었고 평온한 분위기였다고 반박했다.

경찰은 "당시 광주시내의 상황은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민주화, 학원자율화 등을 요구하는 학생시위가 계속 됐고 폭력행위로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며 "하지만 경찰과 학생들은 일정한 룰(rule)이 있었고 서로 배려하는 분위기 하에 항상 대화 채널이 가동돼 있었다"고 밝혔다.

또 "5 18 직전인 5월16일은 경찰의 보호아래 평화적 가두시위가 있었고 5월 17일은 대부분의 진압부대가 휴식과 야유회를 실시하는 등 평온한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 공수부대 과잉진압은 우발적?

5·18 당시 투입된 공수부대가 공격적 검거 위주의 진압방식과 잔혹행위를 저지르면서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점은 모두 동의하는 사실이다.

다만, 신군부 측은 공수부대의 과격 행위가 의도성이 없고 현장 공수부대원들의 우발적인 행위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경찰은 우발적이 아니라 초기에 공포감을 조성해 계엄 확대 조치에 대한 국민저항을 억누르려는 의도성이 있었다고 반박했다.

경찰은 "치안당국인 경찰과 협의 없이 경험 없는 흥분한 공수부대를 시내작전에 투입해 한두 시간 만에 300여명이 넘는 인원을 검거했다"며 "무차별적인 폭력을 자행해 시민 감정을 크게 자극했다"고 밝혔다.

또 "시가지 투입작전 실시 전 이미 공수 1개 여단을 증파하는 등 광주에 대한 군부대의 지속적 증원이 이뤄졌다"며 "악화되는 상황에서도 길고 위협적인 진압봉으로 긴급히 교체지급하고 강경 일변도의 작전을 계속하여 상황을 극단화시켰다"고 말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동구 금남로와 전일빌딩 주변에 헬기가 떠 있는 것을 기자들이 촬영한 사진.(5·18기념재단 제공)2017.1.12

◇ 시민군과 계엄군 총기 발포 누가 먼저 했나?

5·18 논란 중 하나는 시민들의 총기 탈취 시점이다. 계엄군과 시민군 중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느냐의 논란이기도 하다.

신군부는 시민들이 총기를 탈취해 무장하고 발포했기 때문에 자위권 차원에서 계엄군의 발포가 불가피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찰은 계엄군이 5월21일 오후 1시 도청 앞에서 집단발포한 이후 시민들이 무장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당시 광주시내 경찰무기는 5월19일 모두 치웠고 5월20일 야간에 광주세무서 칼빈 17정이 피탈됐으나 실탄이 없었다"며 "최초로 실탄을 갖춘 무기 피탈은 5월21일 오후 1시30분경 나주서 남평지서에서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후 나주, 화순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피탈돼 시민들의 무장이 이뤄졌다"며 "군의 도청 앞 집단 발포가 있던 5월21일 오후 1시 전까지는 시민군의 총기발사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또 "군의 발포는 5월20일 야간 광주역 부근에서 이미 이뤄져 사상자가 발생했다"며 "시민들의 발포로 군의 자위권적인 발포가 불가피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 "북한군 개입? 말도 안돼…정보 보안 형사만 130명"

북한군 600여명이 광주에 잠입해 시위를 주도해 일으켰다는 '북한군 개입설'은 아직까지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논리 중 하나다.

당시 경찰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집회 시위 관리였다. 시위 상황이 발생하면 경찰 정보 보안 형사들이 시위대의 인원, 구성성향, 주장, 시위용품 등을 세밀히 분석해 대응 방향을 정했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경찰은 "'북한군 개입설'은 5·18 당시에는 언급된 적이 없고 당시 작성된 군과 정보기관 작성 서류에도 없는 내용"이라며 "최근 일부 인사들에 의해 주장되고 전두환 회고록에도 많이 암시돼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광주에는 약 130여명의 정보 보안 형사들이 활동하고 시내주요지점 23곳에 정보센터를 촘촘하게 운영했다"며 "이런 형사들의 눈을 피해 광주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수백 명의 북한군이 활동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식 밖의 주장"이라고 증언했다.

또 "계엄 상황 하에서 경찰뿐만 아니라 타 정보기관의 활동도 최고조에 달해 5월21일 이후에도 경찰통신요원들은 시민군이 있던 도청에 대간첩작전 통신망 복구명목으로 수시로 출입했다"며 "이에 협조하는 시민들의 행동에서도 이런 문제를 주의하고 경계하는 내용들이 보인다"고 덧붙였다.

◇ 계엄군 철수 후 광주는 무법천지?

신군부는 계엄군이 철수한 이후 광주 시내는 무장시민군에 의해 살인과 약탈 등 범죄가 판치는 무법천지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찰은 무정부 상태하의 공포와 생필품 부족 속에서도 서로 돕고 배려하는 공동체 정신을 보여줬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큰 혼란 없이 질서를 유지했다고 증언한다.

경찰은 "당시 계엄당국과 정보기관 등에서 대표적 사례로 들고 있는 시민군에 의한 3건의 일가족 집단 살인사건은 확인한 결과 하나의 사건을 부풀리고 그 내용도 왜곡됐다"며 "그 밖에 당시 수많은 금융기관도 피해를 입은 사실이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5·18 종료 후 신고내용, 기록, 증언 등에 의하면 당시 광주 시내는 비교적 안정적이었고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 광주 시민들의 높은 시민정신은 평가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5월21일 오후 3시경부터 전남경찰국장의 지시에 의해 아무런 보호 안전대책 없이 개인별로 무작정 대피했던 2000여명이 넘는 도청 경비 경찰관들은 광주시민들의 헌신적인 도움과 보호로 단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무사히 복귀했다"며 "지금도 당시 경찰관들은 시민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경찰이 처음으로 TF팀을 꾸려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경찰의 역할에 대한 조사결과를 11일 발표했다. 사진은 이날 경찰이 5·18 왜곡과 편향성을 밝혀주는 근거라고 설명한 자료 내용. 2017.10.1

◇ 무능한 안병하 경무관?

5·18 당시 전남경찰국장이던 안병하 경무관에 대한 재평가도 눈여겨볼만하다.

당시 계엄당국과 전두환 회고록에 안 경무관은 근무지를 무단이탈하고 진압업무를 실패해 광주의 불행을 야기한 무능한 지휘관으로 언급돼 있다.

경찰은 "확인 결과 안 국장은 5·18 기간 단 한 번의 근무지 이탈 없이 최선을 다해 수습을 위해 노력했고, 상부의 강경진압을 거부하고 시민의 안전을 강조하는 소신을 유지했다"며 "초기에 광주시내 무기를 치워 탈취 방지뿐만 아니라 경찰무장으로 인한 더 큰 비극을 막았다"고 밝혔다.

이어 "안 국장은 사후 그 공적이 평가돼 순직과 5 18 유공자로 처리됐다"며 "올해 경찰영웅으로 선정돼 흉상 제막을 준비 중"이라고 덧붙였다.

안 경무관은 전남도경찰국장으로 재직하던 1980년 5·18 당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라는 전두환 신군부 명령을 거부했다.

또 경찰이 소지한 무기를 회수하고, 시위대의 부상자 치료와 음식 등 편의도 제공했다.

그는 이 일로 직위해제된 뒤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후유증에 시달리다 1988년 10월 5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광주교도소 습격설'은 의도적 왜곡"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이 광주교도소를 지속적으로 공격했다는 '광주교도소 습격설'은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는 사안이다.

일반 국민들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당시 계엄 당국과 일부 인사들이 광주시민의 폭도성을 주장하는 확실한 근거로 인용되기도 한다.

대규모 정예 특전부대가 주둔하는 요새화된 시설에 칼빈 총으로 무장한 소수 시민군의 지속적 공격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무모한 행위이다.

그럼에도 기록에 의한 군의 주장과 교도소 부근 사망자 발생 등으로 인해 객관적인 사실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경찰은 총기 피탈 조사 과정에서 광주 인근 모든 경찰서가 피해를 입었으나 유독 전남 담양으로 향하는 동부권 경찰서는 아무 피해가 없었고 시민군의 활동도 타 지역에 비해 미약하였던 점에 주목했다.

경찰은 "조사 결과, 당시 광주 교도소의 위치가 담양으로 통하는 지방도로와 고속도로 사이에 위치해 교도소 경계 부대에 의해 시민군의 담양권 진출이 원천적으로 차단됐다"며 "담양권으로 진출하려는 시민군이나 일반 시민들의 활동을 교도소 공격으로 오인했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어 "결론적으로 시민군 공격의 무모함과 비현실성뿐만 아니라 교도소 공격이 없었다는 당시 교도소장등 관계자의 증언과 담양경찰서의 피해 경미, 담양거주 비무장 일반시민의 총격피해 등을 종합하면 시민군의 교도소 지속 공격은 오인, 과장되었거나 왜곡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전남도경 상황일지 조작

전두환 회고록은 '5·18과 관련된 수많은 기록과 진술들을 역사의 진실을 말해줄 소중한 기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경찰은 당시 관계기관에서 작성한 상황일지 등 문서와 기록이 왜곡되거나 편향적으로 기재돼 신빙성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경찰은 "계엄정국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계엄군의 과오나 잘못을 기록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며 "시위대와 시민의 부정적인 면은 과장, 부각되거나 왜곡돼 기록됐다"고 밝혔다.

이어 "전두환이 회고록에서 보인 자신감은 가해자의 입장에서 작성된 수많은 기록과 수사 과정에서 확보된 대상자들의 책임 회피성,변명성 진술 등이 근거로 보인다"며 "기존 기록들에 의해 밝혀지거나 인용된 내용들에 대해서도 오류와 진위를 잘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5·18의 바른 진상은 기존 기록에 의존하기보다는 관련자들의 증언과 참여를 통해서만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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